누군가가 혼자였던 날에 쓴 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어요. 혼자라는 것 자체가 숨겨야만 하는 비밀인 것만 같을 때가 있어서, 그 사람은 그때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조심조심 털어놓았지요. 편지를 읽는 동안 나는 그 사람의 작은 비밀 기지에 초대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 사람이 편지의 수신인으로 나를 선택해주어 고마웠습니다. 언젠가 나도 혼자일 때, 오래 준비해온 선물을 보내는 마음으로 답장을 쓰겠다고 다짐을 하였지요. 답장은 아직까지 쓰지 못했습니다. 혼자였던 날이 없어서는 아니고요. 사실 나는 좀 자주 그래요. 이상하게도 정말 써보고 싶은 편지는 못 쓰게 되고는 합니다. 혼자였던 날에 편지를 쓰지는 못했지만 대신 시를 많이 썼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휴대폰을 붙잡고 소파에 누워 게임을 할 때가 더 많았어요. 그런 날에는 계절감이 짙은 게임을 해요. 끝없는 설원 위를 혼자서 달려가는 게임, 타오르는 듯한 사막에서 쉴 수 있는 그림자를 찾아내 그 그림자 속에 몸을 웅크리는 게임, 벚꽃이 날리고 또 날리고 내가 손가락을 꽃잎 위에 가져다 대면 그 벚꽃이 잠시 공중에 멈추는, 그런 게임. 나는 오랫동안 검은 우주에 둥둥 떠 있기도 하고 우주와 꼭 닮아 있는 심해의 어둠 속을 헤엄치기도 해요. 쓰고 싶은 편지가 많아지고, 그래서 편지를 못 쓰는 날들도 쌓여가고, 너무 많은 게임을 하고, 그래서 너무 많은 계절 속에 머물게 되는 계절. 가끔은 알록달록해져가는 창밖을 보며 그게 가을의 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나는 지금 이곳에 조심스럽게, 내가 가을을 싫어하는 이유와 좋아하는 이유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지만 나에게는 작은 비밀이지요. 편지를 아직 쓰지 못했다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편지를 보냈다고도, 아직 보내지 못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이 찝찝한 기분이 좋아요. 후련하지 않으면 또 편지를 쓰게 될 테니까요. 추신 : 편지에 나오는 게임들은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정말로 가을에 그 게임들을 했어요.
📗 PIN 023 문보영, 『배틀그라운드』
어렸을 적 영화 「패왕별희」 에서 본 탕후루가 너무나 맛있어 보였던 나머지, 나는 아직까지 탕후루를 먹어보지 않았습니다. 먹어보지 않아서 영화 속 탕후루를 계속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나는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좋아하는 것은 설원맵인데, 시집 속 사후 세계나 밀밭, 초원맵에는 자주 들릅니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의 유선혜 시인이 56번째 핀 시리즈 시인선으로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주체, 사랑이 놓였다 지나간 자리, 이후에 찾아오는 다양한 병리와 희망 등을 꼼꼼히 관찰하며, 거기 드리운 어둠과 빛에 대한 이야기를 시인만의 발랄하고 거침없는 언어와 시선을 통해 이야기하는 시집입니다. ✨ “네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우리의 서사라는 예감”(「세계문학과 레모네이드」) 속에서 찬찬히 풀어낸 “오로지 인간에 관한 이야기”, 그 필사必死의 아름다운 기록이 찾아올 11월, 더욱 깊어질 가을의 소식을 가만 기다려주세요! 🥹
시시낙락 가을 특별호, 첫 번째 임솔아 시인의 가을 이야기 잘 읽어보셨나요? 😊 지난번 레터에서 가을 특별호의 시인을 구독자님들께 추천받아보았는데요. 구독자분들께 많은 추천을 받은 시인 중 한 분이, 바로바로 임솔아 시인이었답니다. 다음 달, 가을 특별호 시인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 (힌트 : 핀 시인선 13) 10월 가을 특별호는 10월 24일 오후 6시 발행합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