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태어나서인지 저는 가을을 유난히 좋아합니다. 보호색을 입는 동식물처럼 가을이 되면 가을이 품고 있는 색과 소리에 곧바로 동화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같은 음역대의 음률처럼 가을의 질감과 비슷해지면서 가을이라는 세계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세계의 부분이 아닌 세계 그 자체가 되는 감각. 자신을 채우는 것이 온전히 자신만이 아님을 알게 될 때 무한히 확장되는 내면의 자리와도 같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저는 초중고 내내 학교 문예부 활동을 하며 매년 가을이면 교외 백일장에 나가곤 했습니다. 지역의 이웃 학교 학생들이 모인 넓은 잔디광장에서 글쓰기 주제를 들은 뒤 선선한 나무 그늘이나 기념탑의 반들반들한 돌계단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열여섯이었던 그해 가을에도 그렇게 학교 밖 잔디광장에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가을 한낮의 바람은 비현실적으로 우아하고 쾌적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글을 쓰다가 눈을 들어 잔디광장을 바라보았을 때 문득 저는 저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흔들리던 나무 잎사귀도. 흐르던 구름도. 지나가던 광장의 사람들도. 오직 저 혼자만이 그 세계의 유일한 존재로 남아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저는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본질이구나 느끼며 왜 그런지 기쁘게 쓸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재라고 부르는 지금 이곳의 이 현실 세계는 아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매 순간 우리의 시선과 감각을 배반하며 배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 너머로 자신을 감추며 혹은 자신을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세계는 그렇게 그저 있는 것으로. 우리의 인식이, 우리의 오래도록 학습된 사고 패턴이, 우리의 좁고 편협한 언어가, 우리의 세계를 작고 얕게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가닿게 되면, 우리는 인식의 저 너머로 나아가는 무한의 문을 훌쩍 건너가게 됩니다. 그렇게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가을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걷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걷는 것은 쓰는 것과 닮은 몸짓을 갖고 있습니다. 온전히 사라지면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걷고 걷다가 눈을 들어 저 너머를 바라보면 오래전 잔디광장의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열여섯의 제가 보입니다. 순간 멈추었던 풍경이 다시 움직입니다. 저는 잔디밭에 엎드려 글을 쓰던 열여섯 살인 동시에 더는 아무것도 읽지 않아도, 쓰지 않아도 되는, 어둡고 밝은 눈을 가진 죽음 직전의 늙은 사람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가을 나무가 하나둘 잎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시 봄이 오면 다시 잎을 맺으려고 나무는 잎을 떨어뜨립니다. 새봄의 나뭇잎은 지난봄의 나뭇잎과는 다른 잎이겠지만 명백하게 이전의 나뭇잎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존재는 과거를 품은 채로 미래로 나아가니까요. 우리는 걷기 앞에서, 글쓰기 앞에서, 시간 앞에서, 미래를 품은 채로 흘러가는 직전의 과거만을 감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순간을 살아간다는 것의 가장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걷고 걸으면서, 쓰고 쓰면서,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잊었던 것들을 더 많이 불러들이려고 합니다. 불러들여서 다시 또 잊으려고, 다시 또 태어나게 하려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라는 존재도 흘러갑니다. 존재의 허무, 세계의 공허 혹은 언어의 심연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순간순간 드넓은 무(無)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고 진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드넓은 무의 세계야말로 무한과 닮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만함은 나 없음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리고 일어난 일은 다시 사라진다고.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같은 무게로 받아 안으면서 다시 또 잊으면서 이 가을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러니 이 가을날 당신은 당신이면서 매 순간 당신도 모르는 무한을 덧입는 또 다른 당신입니다.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라고 썼던 오규원 시인의 문장과 함께. 모두에게 무한히 환하고 드넓은 가을날이길 바라봅니다.
*오규원, 「봄」 중에서(『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