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고백하자면, 저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시시한 고백을 들은 사람들은 보통 의아해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저는 당신이 여름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당신 시에서 여름을 긍정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매번 기대를 배반하는 편입니다. 저는 ‘시인’처럼 멋있는 말을 하기보다 솔직한 말을 잘하는 편이고, 이타적이기보다 이기적인 성격이고,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 몇 줄로 나의 여름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걸까요? 만약 누군가가 제게 단 한 문장으로 스스로를 소개하길 요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나는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 청개구리 심보로 인해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025년에도 여름은 여전히 인기니까요.
여름은 언제까지 여름인 걸까요? 모든 여름을 긍정하는 순간이 오게 될까요? 물론 저에게도 애정하는 여름의 장면이 있습니다. 해변에서 터지는 폭죽, 한밤중에 마음껏 땀 흘리며 골목을 쏘다니는 친구들, 폭염 속에서도 마주 잡은 두 손, 하나의 우산을 두 명이 쓰는 모습, 상대에게 우산을 기울이느라 젖은 한쪽 어깨 같은 것입니다. 저는 매년 여름마다 이와 같은 장면을 비슷하게 반복하고, 그 몇 개의 장면으로 그해의 여름을 견디며, 막연하게 다음 여름을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지난여름에는 어느 해변에 갔습니다. 겨울이면 제가 자주 가는 곳입니다. 함께 간 그 애는 물이 무서워 깊은 곳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발목이 겨우 젖는 해안선을 따라 오래 걸었습니다. 그러다 서서히 몸을 적시기도 하고, 물살에 몸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애에게 말했습니다. 사실 이 해변은 다소 심심한 곳이란 것을, 겨울에 오면 할 것이라곤 산책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오직 파도를 감상하기에 좋다는 것을.
예전에 그곳에서 몇 편의 시를 썼지만 그게 무슨 시인지 그 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번 기대를 배반하는 편이고, 그것이 여름과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여름을 견딜 수 있으리라 다짐하면서도 끝내 여름은 저를 배신하고 멀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름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 문장을 읽으면 여름이 한 문장만큼 사라집니다. 두 문장을 읽으면 여름이 두 문장만큼 사라집니다. 상온에서 음식이 조용히 상하고 저는 조금씩 숨을 쉬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여름의 폭염과 폭우를 떠올리며 「이상기후는 세계의 조울증」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폭염과 폭우를 무사히 지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이번 여름이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모두 부지런히 여름의 장면을 채집하길 바라겠습니다. 그것은 여름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