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 번째 시집 출간을 축하드려요. 요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감사합니다. 네 번째 시집이라니, 너무 빨리 와버린 기분이 듭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모든 것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요. 조금 혼란한 상태로, 그것을 다독이며 지내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끝나가는 여름을 붙잡고 싶다는 소용없는 생각들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2. 네 번째 시집 제목이 『경의선 숲길을 걷고 있어』인데, 평소 경의선 숲길을 자주 걸으시나요?
여러 해 전엔 자주 걷기도 했던 것 같은데, 요즘엔 그렇지 못하네요. 하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양한 상점들, 작고 기품 있는 서점들, 사람들, 모두 그 길만의 특색을 만들어주는 요소들인 것 같아요. 몇 년 전부턴 안국에서 소격동으로 걷거나, 종로에서부터 안국 너머 창경궁으로 걷거나, 어떨 땐 혜화에서 성북동으로 걸어요. 여름에도 땀을 흘리며 걷곤 했는데, 이제 더위가 지나가면 본격적으로 산책의 날들이 펼쳐지겠죠.
3. 『경의선 숲길을 걷고 있어』라는 제목부터 시작해 ‘안국’, ‘이대 앞’, ‘동묘’ ‘은평구’ ‘성북구’ 등 시인님의 시에는 서울의 익숙한 지명들이 자주 등장해요. 이렇듯 시 속에 익숙한 (특히 서울의) 지명을 쓰시는 이유는 무엇이며, 시인님께 ‘서울’이라는 도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맞아요. 적지 않게 쓴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제가 서울의 곳곳을 아주 사랑하기 때문이겠습니다. 걷지 않으면 모를 일들이 서울엔 아주 많죠. 얼마 전엔 ‘조선어학회 터’라고 쓰인 석판을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제법 지나쳐본 길인데 이제야 발견했구나 하면서요. 오래전 흔적들이 거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주 경이롭게 여겨져요. 그 곁으론 크고 높은 건물들, 쾌적한 길, 지저분한 길, 시위하는 사람들, 사진 찍는 사람들, 버스, 자동차, 궁궐, 나무들, 끝이 없는 서울이 있어요. 그런 복합성 속에서 걷는 일이 저의 많은 것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 같아요.
서울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장소의 특성과 결부된 지명들에 대해 각별한 감각을 갖게 된 면도 큰 것 같아요. 장소에 대한 저의 개인적 체험과 이미지, 그리고 지명이 안고 있는 발음이나 의미 등이 결합된 감각이라고 할까요. ‘서울’은 언제나 저의 현재이자 과거예요. 물론, 미래이고요.
4. 시인님의 시를 읽다보면 화자와 함께 느긋하게 산책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화자가 본 풍경은 일상적이고 간결하지만 묘하게 슬프거나 따뜻한 정서를 품고 있는 듯해요. 시인님께서는 주변의 무엇에서 시적 영감이나 소재를 얻으시나요.
글쎄, 영감이랄까 그렇게 표현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단지 언제나 어떤 체험을 하는 기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밟고 있는 땅과 이름,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 상점들, 멀리 보이는 것들, 가까이 보이는 것들, 지나갔던 사람들, 다가올 사람들, 하루의 색채, 저녁이 다가오는 소리, 그런 것들요. 그런 것들이 전혀 다른 사유들과 결합되기도 하고요. 그런 과정이 저의 쓰기를 자주 즐겁게 하는 것 같아요.
5. 시인님께서 제일 애정하고 애착하는 장소, 가장 많이 머무르는(혹은 머무르고 싶은) 장소는 어디인가요?
최근 여러 해 동안엔 테라스가 있는 카페들에 자주 머물러요. 길거리와 구분이 흐릿한 그런 테라스들요. 한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테라스에 앉아 있곤 해요. 바깥의 느낌이 좋아서인지, 계절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느낌이 좋아서인지, 사람들이 스쳐가는 걸 보고 느끼는 게 좋아서인지. 몇 군데 중요한 장소들을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어요.
6. 시인님께서는 여행을 좋아하시죠. 이번 시집도 여행지에서 만들어졌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맞아요. 이번 시집도 여행하는 동안 편집자님과 소통하며 작업했죠. 사실 여행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온갖 거리들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낯선 곳에 가서도 언제나 거리를 느리게 걸어 다니거든요. 모두가 가보는 주요 장소들을 놓치곤 하면서요. 기억에 남는 여행지라면, 꼽기는 어렵지만, 지금 문득 생각나는 곳은 여러 해 전 겨울에 갔던 마드리드에요. 햇빛 색깔이 기억에 남아요. 한낮인데 너무 노랗고 강렬해서 좀 서글픈 그런 색들이 이어졌어요. 프라도 미술관은 문을 닫았고 하릴없이 그 주변을 한참 서성이면서 놀았는데, 그런 기억들이 저에게 각별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언젠간 이런 얘길 시로 써보면 좋겠다 생각하곤 해요. ‘언젠가’는 언제나 매우 늦게 도착하기는 하지만요.
7. 시인님의 시를 ‘시와 일기 사이의 머뭇거림’이라고 소개하는 문장을 봤어요. 시가 일기가 될 수도 있고, 일기가 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시인님께서는 일기를 쓰시나요? 시인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시와 일기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저의 첫 시집 해설에 실린 문구로 기억해요. 모든 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의 경우라면 시도 일기도 모두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문장들이죠. 일기는 안 써요. 간략한 메모들만이 있을 뿐이죠. 그런데 그 메모마저도 일어났던 사실은 적지 않는 편인 것 같아요. 강렬한 인상, 찾아봐야 할 것들, 누군가의 강렬한 말, 문장, 등등이죠. 시와 일기의 차이점을 물으셨는데, 문득 이렇게 질문하시니 작고하신 스승님인 이승훈 시인이 떠오르네요. 이승훈 선생님이었다면 아마도 ‘모든 게 다 시다’라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저도 그런 입장에 동의해요. 하지만 아마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시는 허구화된다는 거예요. 그게 작가로써 즐거운 과정이기도 하고요. 거짓말을 하면서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내는 것.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작가들의 동력일 거고요. 현실의 ‘나’로서의 체험만을 쓴다면 새로운 문장은 끝날 거예요. 일어났던 일만 적는다면 사유도 끝날 거고요. 하지만 우린 끝나지 않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고, 독자 역시 그 안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죠.
8. 자유롭게 단 한 사람,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볼 수 있다면, 누구의 일기장을 읽어보고 싶나요?
고민되는 질문입니다. 너무 많은데.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에 공개된 저명한 작가들의 일기를 보면, 뜻밖에도 다소 정제되어 있잖아요. 문장도 엄청 멋있고요. 그런 작가들을 보면 일기를 쓸 때에도 나 자신으로서의 독자, 또는 더 나아가면 미지의 독자들을 의식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조금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려보자면, 더 솔직하고 유치한 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의 것을 보고 싶어요. 고등학교에 다니는 주혁이의 일기 같은 것.(주혁이는 제 친구입니다.) 그래도 아쉬우니 한 명만 더 볼 수 있다면, 김혜순 선생님의 80년대 일기요. 올 초에 뒤늦게 김혜순 선생님의 인터뷰집을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이상하게 좀 눈물이 나기도 했어요. 70년대 후반 편집자 시절 이야기를 이따금씩 하시기도 하는데, 어린 김혜순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80년대 김혜순의 솔직하고 유치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매력적일지. 유치하다는 말이 자주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저는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중이에요.
9. 「날개」라는 시에서 ‘나는 네가 너인 것을 알면서/천사라고 생각해’라는 구절이 나와요. 저는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하는데요. 시인님도 이미 진실을 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착각하거나 오해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실제적인 사실과 진실도 있지만, 우리에겐 다른 측면에서의 기억과 진실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 후자라면, 그것이 설령 실제와 다르다 해도 진실에 가까운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경우는 아주 많은 것 같아요. 저의 경우는 어린 시절 기억들이 그렇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지만 나만 간직하고 있는 기이한 경험들도 있고, 몽유병 비슷한 경험도 몇 차례 있었어요. 잠에서 깨어났는데 어쩐지 생경한 느낌이 들 때면, 엄마 옆에서 잠들었는데 언니나 오빠 옆에서 깨어났다는 걸 깨닫거나, 손발이 꽁꽁 언 것처럼 차가워서 어딘가 밖을 돌아다닌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거나. 크면서 차츰 나아졌는데, 가족에게 물어보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요. 저는 저의 경험대로 간직할 뿐이죠. 이것이 어린 날의 착각이었다 해도, 시리고 차가운 감각들,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낯선 불안과 두려움, 그런 것들은 저에게 남아서 작용하고 있으니 진실의 한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10. 시인님만의 글쓰기 전 루틴이 있나요?
루틴이랄 것까진 없지만,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땐 하염없이 음악을 듣습니다. 대체로 한 곡만을 반복해서 듣는 편이에요. 이번 시집을 마무리할 땐 친구가 만들어 보내준 곡을 한없이 들었어요. 이런 방법이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책상에 앉아 오랜 시간을 버티어낸다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11. 핀 시인선에는 〈시인의 말〉이 없는데요. 이 지면을 통해 〈시인의 말〉을 덧붙인다면?
사실 이번 시집에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으로 시인의 말을 대신하고 싶네요. “전봇대, 쓰레기 더미, 편의점, 간이 테라스, 간이 테이블, 간이 의자, 촛불 켜고 앉아서.”
12.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께 한마디 부탁드려요.
여름이 끝나가는 계절입니다. 이제 막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시작되었으니 설레고 상쾌한 기분을 가득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틈으로 바람 부는 곳에 앉아 책도 읽고요. 그러다 어느 즈음에서 저도, 저의 시집도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