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계절과 다르게 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생각. 무언가 해야만 할 것들(대청소, 꽃구경, 나들이……)을 잔뜩 심어놓고서는 홀연히 가버리는 뒷모습. 또 늦었구나. 벌써 끝나가고 있구나. 혼자 무심히 흐드러지면서 봄의 어설픈 따뜻함에 그제야 진짜 추위를 느끼는 사람. 저를 이렇게 소개해보려고 했었습니다. 3월 중순에는 전남 구례에 다녀왔습니다. 산수유 축제가 열리기 하루 전날이었어요. 예년보다 덜 따뜻해서 꽃은 거의 안 피어 있었고, 따뜻한 자리에서 막 개화한 한두 그루의 매화나 산수유나무만 눈에 띄었어요. 이렇게 봄보다 먼저 다녀가는 기분도 좋구나. 만개한 꽃나무는 볼 수 없었어도 곧 이곳에 꽃들이 하늘 아래 현현하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겠구나. 너무 부지런한 일이 모질게도 느껴졌지만 늦게 도착하는 일보다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동차 문을 반쯤 내리고, 층층으로 이웃해 자라나는 차밭을 구경하고, 이 도로는 모두 벚나무로 우거져 있지만 꽃이 없어 다음에 오면 좋겠다고 약속 하나를 쥐는 일이 모두 먼저 온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시는 당장 마음에서 나서는 일을 말하지 않고, 다음 해 산수유나무를 보러 가는 일. 작년에 너무 일찍 와 보지 못했던 꽃을 실컷 보려다가 또 아주 늦게 도착하는 일. 시는 제때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시는 당장 내 마음을 또박또박 읽어주기도 하고, 언젠가 경험했던 일을 불현듯 그려주기도 하는 회화의 아수라장입니다. 시에서 우리는 산수유나무를 지나치며 스치는 사람들입니다. 봄에는 그럴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환희와 우울이 난무하는 난장입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는 곳에는 봄에 피어나기로 약속한 나무가 있습니다.
조만간 집 근처 공원에라도 갈 마음으로, 언젠가 접어 넣어두었던 돗자리를 펼쳤습니다. 작년에 앉아 있던 자리로 내려앉은 꽃잎과 잔디 들이 후드득 떨어집니다. 이제 청소를 해야겠다. 창문을 열고 화분들을 햇빛 기둥에 세워두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겨울 내내 멀뚱히 지켜내고 있던 마음이 녹아 글썽거리면,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꽃가루가 날리나 보다, 애먼 재채기하는 흉내를 내면서 봄에게만 들려주는 방백도 있는 것입니다.